기자수첩//취재일기
거제대대 아주/옥포1동대장 이상준
- 문영숙, <독립 운동가 최재형>을 읽고
시끄러웠던 나라 분위기와 동시에, 국민들은 청렴과 부패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계기를 갖기도 했다. 그 때문일까. 오래 전 청산되지 못했던 ‘친일파’ 논란은, 반대급부로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수많은 순국선열들을 다시금 기억하게 했다. 많은 국민들은 지금, 가장 귀중한 자신의 삶과 대한민국의 독립을 맞바꾼 독립 운동가들을 주목하면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그들의 노고를 발견하기 위해 애 쓰고 있는 듯하다.
사실 한국인의 역사적 DNA에는 일제 강점기가 아로새겨져 있다. 직접 그 시대를 경험해 본 적 없는 이들이라고 해도, 위안부 관련 기사를 접할 때나 독립 운동가들의 삶을 기록한 영화를 관람할 때 우리는 함께 분노한다. 안중근, 윤봉길, 윤관순 등 이름만 들어도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까닭은 독립 영웅들의 삶을 반추하며 당시 일제의 만행들이 얼마나 악랄했는지 지금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디 그 당시 자신의 삶과 목숨을 버려가며 독립 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이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 뿐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지도 못한 채 독립의 현장에서 장렬히 전사했을 것이다. 군인으로 살아가면서, 그런 이들의 노고와 열정이 얼마나 뜨거운 것인지 알게 되었다. 이름이 기억되는 이들은 적지만, 승리를 위해 똑같은 피를 흘린 이들은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이름이 기억되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의 노고의 무게가 가볍다고는 누구도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문영숙 저자의 <독립운동가 최재형>은 내게 뜻 깊었다. 평소에 독립 운동가들의 행적과 열정에 큰 감명을 받아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재형’이라는 이름은 사실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접해 보았기 때문이다. 비교적 관심이 있는 나조차도 처음 들어본 이름, ‘최재형’.
처음에는 그저 책으로 그의 활약상이 기록될 정도로 많은 업적을 세웠을 이가 왜 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독립 운동가 최재형은 주로 현재 러시아 땅에서 ‘고려인’으로 불리는 한인들이 당시 살고 있었던 연해주에서 활약한 인물이라고 한다.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유길준’ 등이 아직 청나라의 근대화 이론을 배우고 있을 1870년대, 최재형은 이미 싱가포르 등 외국의 항구에서 능숙하게 영어로 대화하며 우리나라의 개화를 이끌었다. 말하자면 어떤 면에서는 최재형이야말로 진정한 근대화의 선구자로 불릴 만한 인물인 것이다.
그런 그가 왜 이토록 주목받지 못한 것일까. 아마도 그의 신분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저명한 독립 운동가들이 ‘양반’ 신분으로 신문물을 습득했던 것과는 달리, 최재형은 천민의 신분으로 큰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정신적 유물로 기능했던 유교가 사람들의 삶 깊숙이 침투해 있었으므로, 근대화를 그토록 원했던 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분은 여전히 그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그가 빛을 보지 못한 까닭은 그의 모호한 정체성에 있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호하게 보이는’ 정체성이지만 말이다. 다수의 역사학자들과 당대 지식인들은 그가 공산주의 국가인 러시아에 도움을 준다는 이유로 그의 독립 운동을 부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과연 그것 하나 때문에 그의 업적을 지워버려도 되는 것일까. 최재형이 러시아를 도왔던 것은 연해주에 거주했던 고려인들의 인권을 위해서였을 뿐, 그의 업적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의 뜨거운 가슴 속에는 오로지 민족에의 대한 애정과 존경만이 존재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아직까지 굳게 자리 잡혀 있었던 신분제도는 근대화의 속도를 늦추고 우리 국민들의 인권을 처참하게 유린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최재형은 여성인 자신의 부인을 ‘동지’처럼 대해주고 자신보다도 낮은 신분 질서에 속해있는 빈민들에게 ‘평등’이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주었다. 빈민이나 고아 등, 신분 질서의 최하위권에 속해있던 사람들이 당시에는 그저 계몽과 지도의 대상이었다면, 최재형은 이들을 평등한 동지로 인식한 것이다. 진정한 근대화와 계몽이 무엇인지 매우 깊이 있게 인식하고 있었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시의 빈민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았던 이들이 잘못된 근대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그들은 민족과 국가를 사랑했으며, 자신의 삶을 버려가며 국권을 되찾기 위해 애썼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최재형의 ‘천민 신분’, 그리고 ‘모호해 보이는 정체성’, 혹은 공산주의 국가로 전락해 버린 구소련과 가까웠던 ‘친러 개화파’라는 수식어가 그의 업적을 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명한 독립 운동가가 그랬듯, 최재형은 자신의 방법으로 애국했고 자신의 삶,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국가와 민족에 쏟아 부었다.
당시 양반이나 중인 출신들, 말하자면 ‘문명개화인’들이 개화의 중심에서 책이나 서양의 근대화 서적을 보면서 근대와 인권의 개념을 학습했다면, 천민의 자식이면서 가난했던 최재형은 자신만의 방식인 ‘몸으로’ 근대를 배웠다. 10대 초반부터 러시아 상선으로 일하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누볐고, 그 과정에서 러시아어와 유럽의 다양한 문화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 연해주와 국경 등지에서 국권을 되찾고 근대화를 앞당기는 방식은 ‘엘리트’ 개화인들과는 달랐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동포에 대해 가렴주구를 일삼는 러시아 권력자들의 횡포에 맞서 싸우고, 가난이 일상이었던 자신의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 안전 등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드는 법치를 바로 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최재형은 애민과 애국을 일궈냈다.
애국이 무엇인지, 그 방향성이 모호해 질 때면, 그래서 나는 앞으로 최재형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더라도, 변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소명을 실천해가며 평등과 사랑을 실현했던 최재형은 누구보다도 빛나는 독립 운동가였다. 그의 삶은 역사의 중심부에서 조금 먼 곳에 자리 잡게 되었지만, 그가 실천했던 애국과 애민의 정신만큼은 내 마음 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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